옥이랑의 작업은 디자인을 둘러싼 구조의 작은 틈에서 시작한다. 책장의 배열, 인덱싱 방식, 아카이브의 구조, 서버의 위치, 플랫폼의 고립성처럼 겉으로는 중립적으로 보이는 시스템이 누구에게는 진입 장벽이 되는 순간을 살핀다. 그 구조를 읽고, 다른 질서가 가능한지를 묻는다.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며 출판과 제작을 처음 접했다. 당시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완성된 결과보다 제작에 필요한 정보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가였다. 특히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일수록 종이, 판형, 인쇄 같은 실질적인 제작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이 이후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재학 중 진행한 「낯선만남」 프로젝트 [1] 는 짧은 교육 과정 안에서 선후배가 충분히 만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관계에서 시작했다. 선배와 실무자를 인터뷰하고 종이 샘플과 제작 정보를 모았으며, 이를 「낯선종이」 [2] 와 「낯선판형」 [3] 으로 정리해 텀블벅 [4] 을 통해 공개했다. 제작 지식을 개인의 경험으로 남겨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겨 본 첫 시도였다.
이후 홍익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하고 시각디자인과 판화를 부전공하며 관심은 아카이브와 인쇄, 미술 생태계 [5] 로 넓어졌다. 친구들과 미술 비거니즘, 환경 문제, 작가의 작업 환경과 판매 경로에 관해 대화를 이어 갔고, 출판과 웹을 매개로 여러 실험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보존을 전제로 하지 않은 인쇄물인 에페메라 [6] 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에페메라 아카이브 프로젝트」 [7] 에서는 버려졌거나 곧 버려질 전단, 티켓, 편지, 안내문을 모으며 무엇이 기록으로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지를 물었다.
안그라픽스 [8] 출판부에서는 북 디자이너로 일했다.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일과 함께 제작 과정 자체를 설계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고, 전지 규격과 절수, 종이 결 정보처럼 현장에서 반복해서 필요하지만 흩어져 있던 정보를 정리해 판형조견표 [9] 와 종이발주계산기 [10] 를 만들어 공개 배포했다. 출판 노동의 일부를 공유 가능한 도구로 옮긴 작업이었다.
이후 「새로운 질서」, 소모임 「어떤 질서」 [11], 「코딩 클럽」 을 거치며 퍼블리싱을 보는 관점을 코딩 환경으로 확장했다. 종이에서 다루던 분류, 접근, 배포, 저장의 문제는 웹과 서버에서도 다른 형태로 반복되었다.
hup에서 선보인 「Temporary Shared Hub」 [12] 는 사적인 책장을 임시 공유 공간으로 옮긴 프로젝트다. 서가를 취향의 목록이 아니라 교육, 노동, 계급, 젠더와 같은 조건이 축적된 구조로 읽고, 책이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이동하는지 살폈다. 이어지는 전시 수건과화환에서 진행된 「전달되지 않은 메시지의 의미: 전송 중 분실」 [13] 에서는 404 오류를 도착하지 못한 메시지, 삭제된 기록, 공적 기록의 공백을 바라보는 장치로 사용했다.
현재는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Design Academy Eindhoven) [14] 에서 소셜 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책, 웹, 서버, 아카이브를 오가며 정보와 도구가 어떻게 배치되고, 누가 그 구조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계속 다룬다.
현재 생태제작소를 운영하고 있다.
[1]
선후배의 낯선 관계 속에서도 서로가 연결될 수 있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로, 짧은 교육 과정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관계 구조를 다시 사유하려는 시도였다.
This project began with the imagination that people could connect even within unfamiliar senior-junior relationships, and was an attempt to rethink relational structures that pass by within a short educational period.
[2]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종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어 전문가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거쳐 약 76종의 종이 데이터로 확장된 종이 리서치 프로젝트
A paper research project that began by investigating papers actually used by visual design students and expanded to around 76 paper datasets through expert interviews and archival research.
[3]
전지 규격과 절수, 종이의 결 방향(grain direction) 등 인쇄 제작에 필요한 기본 정보를 정리한 판형 도구
A format tool that organizes fundamental print-production knowledge, such as parent sheet size standards, imposition units, and grain direction.
[4]
텀블벅(Tumblbug)은 한국의 대표적인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으로, 독립 출판·디자인·예술 프로젝트 등이 후원으로 제작되는 구조로 운영된다.
Tumblbug is one of Korea's representative crowdfunding platforms, where independent publishing, design, and art projects are produced through public support.
[5]
한국미술장터 아카이브 프로젝트 등 일부 시도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어 있다.
Some attempts, including the Korea Art Market archive project, remain in a temporarily suspended state.
[6]
Ephemera는 보존을 전제로 하지 않고 제작된 인쇄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전단, 티켓, 포스터, 편지, 광고지 등 일시적 사용을 위해 제작된 인쇄물을 포함한다. 디자인 및 기록 연구에서는 이러한 인쇄물이 특정 시대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연구되기도 한다.
Ephemera refers to printed matter not originally intended for long-term preservation, including flyers, tickets, posters, letters, and advertisements made for temporary use. In design and archival studies, such materials are also researched as records that reveal social and cultural contexts of specific periods.
[7]
버려졌거나 곧 버려질 인쇄물, 전단, 티켓, 안내문 등을 수집하고 다시 맥락화하여 인쇄물의 가치와 기록의 기준을 다시 질문하는 프로젝트
A project that collects and recontextualizes discarded or soon-to-be-discarded printed matter, flyers, tickets, and notices to question the value of print and the criteria of record-keeping.
[8]
안그라픽스는 1985년 설립된 한국의 디자인 전문 출판사로, 그래픽 디자인·타이포그래피·건축·시각문화 관련 서적을 출판해 온 대표적인 디자인 출판사 중 하나이다.
Ahngraphics is a Korean design-specialized publisher founded in 1985, and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design publishers in Korea, publishing books on graphic design, typography, architecture, and visual culture.
[9]
전지 규격과 절수, 종이 결 방향을 자동으로 계산해 인쇄 제작 시 필요한 판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도구
A tool designed to automatically calculate parent sheet standards, imposition units, and grain direction so required print formats can be checked more easily.
[10]
다양한 전지 사이즈를 기준으로 절수와 발주 수량을 자동으로 계산하도록 설계된 제작 계산 도구
A production calculation tool designed to automatically compute imposition units and order quantities based on various parent sheet sizes.
[11]
‘어떤 질서’는 김재연의 프로젝트 「체리 케이크」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Unknown Order” began around Jae-Yeon Kim's project «Cherry Cake».
[12]
서울에서 운영되는 독립 디자인·예술 리서치 플랫폼 Hup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로, 리딩룸 형식의 공간으로 책장을 임시 지식 허브로 전환하는 실험이었다.
A project at HUP, an independent design and art research platform in Seoul, experimenting with turning the bookshelf into a temporary knowledge hub through a reading-room format.
[13]
404 오류는 웹 서버에서 요청된 페이지를 찾을 수 없을 때 반환되는 HTTP 상태 코드로, 인터넷 환경에서 ‘존재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정보’를 상징하는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A 404 error is an HTTP status code returned when a requested page cannot be found on a web server, and is often used as a metaphor for “information that exists but cannot be accessed.”
[14]
Design Academy Eindhoven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 있는 국제적인 디자인 교육 기관으로, 사회적 디자인과 비판적 디자인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Design Academy Eindhoven is an international design school in Eindhoven, widely known for social design and critical design research.